루이나 왕국 초대 콘웨이 백작 제라드 몰트비 Gerard Maltby | |
출생 | 1593년 4월 13일 |
사망 | 1641년 5월 12일 (향년 48세)[1] |
재임기간 | 의회 의원 (노스게이트) |
1614년 ~ 1629년 | |
1629년 9월 2일 ~ 1640년 3월 8일 | |
1640년 3월 8일 ~ 1641년 5월 12일 | |
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2.1. 의회의 비판자 [편집]
1593년 북부 노스게이트의 준남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스물한 살에 하원에 진출했고, 1620년대 내내 국왕의 재정 정책을 비판하는 쪽에 섰다.
1627년 강제 공채 납부를 거부해 구금되었다. 이유를 밝히지 않은 구금이었고, 그는 이 경험을 근거로 이듬해 권리 청원의 문안 작성에 참여했다. 국왕이 이유 없이 신민을 가둘 수 없다는 조항을 다듬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그였다.
1627년 강제 공채 납부를 거부해 구금되었다. 이유를 밝히지 않은 구금이었고, 그는 이 경험을 근거로 이듬해 권리 청원의 문안 작성에 참여했다. 국왕이 이유 없이 신민을 가둘 수 없다는 조항을 다듬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그였다.
2.2. 전향 [편집]
1628년 말, 그는 국왕 진영으로 넘어갔다. 옛 동료들은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이 전향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본인의 논리는 달랐다. 그가 반대한 것은 왕권 자체가 아니라 무능한 왕권이었으며, 왕국에 필요한 것은 국왕의 권한을 깎는 일이 아니라 그 권한이 제대로 행사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후 12년 동안 자신이 말한 그대로 통치했다. 다만 그 통치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폭정과 구별되지 않았다.
본인의 논리는 달랐다. 그가 반대한 것은 왕권 자체가 아니라 무능한 왕권이었으며, 왕국에 필요한 것은 국왕의 권한을 깎는 일이 아니라 그 권한이 제대로 행사되도록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후 12년 동안 자신이 말한 그대로 통치했다. 다만 그 통치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폭정과 구별되지 않았다.
2.3. 북부 총독 [편집]
1629년 북부 총독에 임명되었다. 왕권이 가장 약하고 지방 유력자들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11년의 재임 동안 그는 이 지역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밀린 세금을 남김없이 걷었고, 지방 유력자들의 관행적 특권을 하나씩 무너뜨렸으며,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법정에 세웠다. 총독부의 세입은 재임 기간에 세 배로 늘었고, 북부는 처음으로 국고에 순이익을 내는 지역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북부에 상비군을 편성했다. 급료를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훈련을 지속하는 부대였으며, 규모는 8천에 이르렀다. 훗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이 군대다.
북부에서 그가 얻은 별명이 검은 백작과 북부의 왕이었다. 어느 쪽도 호칭이 아니었다.
11년의 재임 동안 그는 이 지역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밀린 세금을 남김없이 걷었고, 지방 유력자들의 관행적 특권을 하나씩 무너뜨렸으며,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법정에 세웠다. 총독부의 세입은 재임 기간에 세 배로 늘었고, 북부는 처음으로 국고에 순이익을 내는 지역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북부에 상비군을 편성했다. 급료를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훈련을 지속하는 부대였으며, 규모는 8천에 이르렀다. 훗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이 군대다.
북부에서 그가 얻은 별명이 검은 백작과 북부의 왕이었다. 어느 쪽도 호칭이 아니었다.
2.4. 재상 [편집]
1640년 3월, 두 차례의 남부 고지 원정이 모두 실패한 뒤 국왕은 그를 벨포르로 불러들여 콘웨이 백작에 봉하고 국무 재상에 앉혔다. 왕국이 무너지고 있었고, 국왕에게는 실제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었다.
그는 국왕에게 의회를 다시 소집하라고 조언했다. 전비를 얻은 뒤 남부 고지를 힘으로 굴복시키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1640년 4월의 의회는 3주 만에 해산되었고, 그해 가을 다시 소집된 의회는 그가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궁정 안에서도 그는 고립되어 있었다. 왕비 앙리에트는 그를 싫어했고, 다른 각료들은 그의 독주를 견제했다. 그가 기댈 곳은 국왕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국왕에게 의회를 다시 소집하라고 조언했다. 전비를 얻은 뒤 남부 고지를 힘으로 굴복시키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1640년 4월의 의회는 3주 만에 해산되었고, 그해 가을 다시 소집된 의회는 그가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궁정 안에서도 그는 고립되어 있었다. 왕비 앙리에트는 그를 싫어했고, 다른 각료들은 그의 독주를 견제했다. 그가 기댈 곳은 국왕 한 사람뿐이었다.
3. 탄핵과 처형 [편집]
3.1. 재판 [편집]
1640년 11월, 장기 의회는 소집 직후 그를 탄핵했다. 죄목은 반역이었다.
문제는 증거였다. 반역이 성립하려면 국왕에 대한 배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국왕에게 가장 충실한 신하였다. 의회가 내세운 논거는 그가 북부에서 편성한 상비군을 왕국 안에서, 곧 국왕의 신민을 상대로 쓰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각의에서 "이 왕국을 굴복시킬 군대가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는 진술이 유일한 근거였는데, 그 '이 왕국'이 남부 고지를 가리킨 것인지 루이나 본토를 가리킨 것인지는 진술자마다 달랐다.
1641년 3월의 재판에서 그는 스스로를 변호했다. 여러 날에 걸친 그의 변론은 당대에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고, 재판은 의회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문제는 증거였다. 반역이 성립하려면 국왕에 대한 배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국왕에게 가장 충실한 신하였다. 의회가 내세운 논거는 그가 북부에서 편성한 상비군을 왕국 안에서, 곧 국왕의 신민을 상대로 쓰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각의에서 "이 왕국을 굴복시킬 군대가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는 진술이 유일한 근거였는데, 그 '이 왕국'이 남부 고지를 가리킨 것인지 루이나 본토를 가리킨 것인지는 진술자마다 달랐다.
1641년 3월의 재판에서 그는 스스로를 변호했다. 여러 날에 걸친 그의 변론은 당대에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고, 재판은 의회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3.2. 사권박탈법 [편집]
증거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의회는 재판을 중단하고 사권박탈법을 택했다. 죄를 입증하는 대신 법률로 유죄를 선언하는 방식이었다. 이 법안이 하원을 통과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은 것은 국왕의 재가였다. 국왕은 몰트비에게 목숨과 재산을 보장하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한 바 있었고, 실제로 거부할 뜻이었다.
그러나 벨포르 거리에 군중이 몰려들었다. 왕궁 앞에서 왕비를 겨냥한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고, 왕비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 국왕에게 전해졌다.
이때 옥중의 몰트비가 국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목숨 하나 때문에 국왕과 왕국이 위태로워져서는 안 되니 재가하시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가 국왕의 마지막 저항선을 무너뜨렸다.
1641년 5월 10일, 국왕은 사형 집행장에 서명했다. 서명한 뒤 그는 한동안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국왕의 재가였다. 국왕은 몰트비에게 목숨과 재산을 보장하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한 바 있었고, 실제로 거부할 뜻이었다.
그러나 벨포르 거리에 군중이 몰려들었다. 왕궁 앞에서 왕비를 겨냥한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고, 왕비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 국왕에게 전해졌다.
이때 옥중의 몰트비가 국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의 목숨 하나 때문에 국왕과 왕국이 위태로워져서는 안 되니 재가하시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가 국왕의 마지막 저항선을 무너뜨렸다.
1641년 5월 10일, 국왕은 사형 집행장에 서명했다. 서명한 뒤 그는 한동안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다.
3.3. 처형 [편집]
1641년 5월 12일, 벨포르 성 언덕에서 처형이 집행되었다. 수만 명이 모였다고 전한다.
그는 침착했고, 형장에서 짧게 말했다. 자신은 이 왕국의 개혁을 원했을 뿐 그 자유를 해치려 한 적이 없다고 했으며, 이어 군주에게 자신의 안전을 맡기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이 마지막 한마디는 이후 200년 넘게 인용되었다.
그는 침착했고, 형장에서 짧게 말했다. 자신은 이 왕국의 개혁을 원했을 뿐 그 자유를 해치려 한 적이 없다고 했으며, 이어 군주에게 자신의 안전을 맡기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이 마지막 한마디는 이후 200년 넘게 인용되었다.
4. 평가 [편집]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루이나 정치사의 오래된 논쟁거리다.
의회주의 전통에서 그는 폭정의 설계자다. 국왕에게 힘으로 밀어붙이라고 조언한 사람이었고, 북부에서 실제로 그렇게 통치했으며, 그가 만든 상비군은 왕국 전체에 대한 위협이었다는 것이다.
반대편의 평가도 만만치 않다. 그는 당대에 가장 유능한 행정가였고, 부패하지 않았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 적이 없었다. 그가 북부에서 무너뜨린 특권들은 대부분 무너뜨릴 만한 것이었다. 다만 그것을 무너뜨린 방식이 문제였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남긴 결과다. 의회는 재판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법률로 죽이는 선례를 만들었고, 이 선례는 6년 뒤 국왕 자신에게 돌아왔다. 국왕은 서명한 손을 평생 후회했으며, 처형대에서 남긴 마지막 발언 가운데 하나도 이 일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그가 남긴 통치 방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밀린 세금을 남김없이 걷고 지방 특권을 정리하며 상비군을 유지하는 국가는 호국공 체제에서, 그리고 왕위협약 이후의 루이나에서 결국 실현되었다. 그가 국왕을 위해 만들려 했던 국가를 그를 죽인 사람들이 완성한 셈이다.
의회주의 전통에서 그는 폭정의 설계자다. 국왕에게 힘으로 밀어붙이라고 조언한 사람이었고, 북부에서 실제로 그렇게 통치했으며, 그가 만든 상비군은 왕국 전체에 대한 위협이었다는 것이다.
반대편의 평가도 만만치 않다. 그는 당대에 가장 유능한 행정가였고, 부패하지 않았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 적이 없었다. 그가 북부에서 무너뜨린 특권들은 대부분 무너뜨릴 만한 것이었다. 다만 그것을 무너뜨린 방식이 문제였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남긴 결과다. 의회는 재판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법률로 죽이는 선례를 만들었고, 이 선례는 6년 뒤 국왕 자신에게 돌아왔다. 국왕은 서명한 손을 평생 후회했으며, 처형대에서 남긴 마지막 발언 가운데 하나도 이 일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그가 남긴 통치 방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밀린 세금을 남김없이 걷고 지방 특권을 정리하며 상비군을 유지하는 국가는 호국공 체제에서, 그리고 왕위협약 이후의 루이나에서 결국 실현되었다. 그가 국왕을 위해 만들려 했던 국가를 그를 죽인 사람들이 완성한 셈이다.